
멜로디 박의 작품세계
김정은
작가의 창작 행위는 눈 앞에 놓인 현실의 구체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 최대한 타당하고 적합하게 가치판단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에 맞게 과업을 구상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충실히 수행해나감으로써 작가의 제작 행위가 이루어진다. 시간이 흘러 제작 행위의 반복된 경험이 어떠한 깨달음의 형태로 작가가 본래 지향했던 문제의 핵심에 다다르게 되면, 그것이 곧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루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가장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현실 중 하나는 재료의 물질성이다. 화면 위에서 섞이고 퍼지고 스며들고 뭉치고 굳고 마르고 갈라지는 물감의 물질적 특성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부딪치고 씨름해야 할 현실의 문제이다. 그리고 물질의 세계에서 하나의 색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색은 다양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만큼의 다양한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화가들은 원하는 색을 붙잡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물질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화가는 물질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 같이 느끼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곧 그 물질이 되는 듯한 물아일체적 몰입에 빠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제작 행위 중에 경험하는 감각적인 물질성은 화가 앞의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멜로디 박의 이번 개인전 《Spring Snow to Summer Watermelon》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작가가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하고 몸으로 경험한 현실의 파편들을 색의 물성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계절의 변화와 이에 수반되는 다양한 감각은 작가가 주요하게 다루는 테마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문득 “시간의 변화를 색으로 보는 것이 계절이다”라는 화두가 떠올랐고, 이 개념을 계속 머릿속에 되뇌이면서 심화시켜나갔다. 계절의 변화는 매해 반복하며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풍경들을 지나게 되고, 또 그 계절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감각은 언제나 항상 다르다. 그래서 돌아온 계절 안에서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또한 계절의 순환 과정은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쇠퇴하는 과정과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감각하며 태어남과 삶,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황을 되새기게 된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인 〈Spring snow, April〉은 작가가 올해 4월에 경험한 기이한 폭설의 풍경을 넓게 칠한 옅은 민트 색과 그 위에 덧바른 불투명한 흰색의 조합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공감각적 기억이 표상된 추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맨 아래에서 도드라지는 긴 빨간색 면은 이 그림을 완결짓는 조형적 구조로 작동한다.
캔버스는 그림을 이루는 현실 요소 중 하나로서 작품의 전제 조건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캔버스의 물질성에 대한 인식은 작가가 영국 유학 중 받은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작가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캔버스를 직접 제작하는 워크숍 과정이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작가는 캔버스 크기의 규격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본원리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 오히려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캔버스의 크기와 비율을 자유롭게 정하고 변형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할 때 먼저 작업의 시각적 구성이 어떤 화면을 필요로 하는지 고민한 후, 크기와 비율을 정하고, 해당 크기의 캔버스 제작을 업체에 의뢰한다. 주문 제작된 캔버스는 흰색 밑칠이 된 상태로 작가에게 납품된다. 이때 작가는 이미 캔버스에 밑칠된 기본 흰색에 주목하여 이것을 그림의 전제 조건을 규정하는 표식으로 삼으며 화면을 구성하는 구조적 요소로 활용한다. 그래서 종종 그림에 칠해지지 않은 기본 흰색 면을 남겨두는데 이번 전시에 출품된 <Where there is pink, there is peace>와 <Lapis Lazuli>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의 물질적 제작 조건을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곧 작품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캔버스 표면을 덮는 안료의 물질성에 대한 탐구는 작가의 가장 큰 화두이자 키워드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작가는 작품활동 초창기부터 색과 안료의 물성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작가가 색에 천착하게 된 것은 그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실 경험에서 비롯된다. 빛과 색에 대해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겪었던 여러가지 상황들은 결국 작가를 회화라는 매체로 이끌었다. 멜로디 박 작가는 원래 제빵사였다. 제빵사가 어렸을때부터 꿈이었고, 각종 재료를 섞고 조합하고 변형을 가하는 베이킹 작업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 베이킹 재료의 물성을 다루던 경험은 나중에 회화 제작 과정에서 색과 안료의 물성 탐구로 이어지게 된다. 제빵사로 일하던 작가는 어느날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직장을 그만둔 후 그림책 만드는 일을 배워 그림책 작가로 활동한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학부 과정에서 파인아트를, 석사 과정에서 드로잉을 전공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 지금까지 한국 미술계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멜로디 박 작가의 독특한 이력은 그를 기존 한국현대미술계의 계보적 맥락 바깥에 위치시킨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현대미술사의 흐름에서 그동안 중점을 두고 강조되었던 부분은 주로 작품의 의미나 정치∙시대적 의의였다. 그래서 국내 미술대학 출신의 작가들은 대개 한국 미술계 내의 어떤 계보적 맥락에 속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내 미술계와의 접점이 없는 상태로 영국에서 교육 받은 멜로디 박 작가는 한국현대미술계의 역사적 맥락과 상관없이 순전히 본인 눈 앞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현실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매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서구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원리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한국현대미술의 대표적 모더니즘 추상인 단색화는 표상작용을 부인하면서 모노크롬이 색채가 아니라 한국적 정신성이라고 주장하며 색을 비물질화시켰다. 철저하게 물질적인 관점에서 색을 다루는 멜로디 박의 작업은 이러한 경향과 좋은 대조가 된다.
색을 화두로 삼는 멜로디 박의 작품세계에서는 색 이름 자체가 그대로 작품의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Lapis Lazuli>도 그러하다. 하나의 파란색이 진했다가 흐려졌다가 하면서 캔버스 표면에 낙서처럼 펼쳐진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이 파란색 자체이다.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는 동명의 암석에서 추출되는 천연 안료의 이름이다. 우리말로 ‘청금석’이라고도 불리우는 라피스 라줄리 암석은 자체가 선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이 주요 산지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보석으로 사용되었고 유럽에서는 중세시대부터 푸른색 안료의 원료로 도입되었다. 근대에 화학적으로 합성한 파란 안료가 나오기 전까지 라피스 라줄리는 서양 고전 회화의 푸른빛을 도맡아 왔다. 워낙 귀한 안료였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옷 색깔 표현 등에 조금씩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라피스 라줄리 안료가 지금도 조금씩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유럽에는 전통 방식으로 천연 안료를 소량 생산하는 기업이 몇 군데 있는데 청금석에서 추출한 라피스 라줄리 물감이 간혹 판매된다고 한다. 멜로디 박 작가는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이 물감을 손에 넣었고 이 색의 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붓이 아니라 스펀지로 색을 칠한 것이다. 맑고 밝은 라피스 라줄리의 색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감을 묽게 풀어 사용해야 하는데 붓은 묽은 물감이 잘 묻지 않아 화면에 색을 펼쳐내기 힘들다. 그런데 스펀지는 물감을 잘 흡수하면서 다양한 밀도와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색을 직접적으로 캔버스 표면에 뱉어낼 수 있는 도구이다. 이전의 작업 경험을 통해 이미 이러한 점을 파악하고 스펀지를 주요 도구로 종종 사용하고 있었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붓을 배제하고 스펀지만을 사용해 색의 물성을 표현했다. 이와 같이 작가는 여러가지 재료와 기법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눈 앞에 존재하는 물질과 현상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화가로서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는 방식, 즉 작업 환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재료의 물성에 몰입하는 작업 방식은 실존주의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연결된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문제시하기보다는 각 개인이 처해 있는 현실 상황 속에서의 주체적인 실존을 중요시하는 사상이다. 개인으로서 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처음에는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로 시작된 질문이 ‘나는 왜 작업을 하는가?’의 문제를 거쳐 결국 ‘삶은 무엇인가?’, ‘존재는 무엇인가?’ 등의 실존적 물음으로 향하게 된다. 멜로디 박 작가도 학부 시절에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학부 졸업 논문으로 온 카와라 작품에서의 실존주의를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된다. 온 카와라는 하루하루 그 날의 날짜를 그리면서 시간의 기록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작업 <Today> 연작을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했던 작가이다. 이에 영감을 받은 듯 멜로디 박 작가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diary> 연작을 진행하고 있다. 작가는 매일 작은 크기의 정사각형 모양 캔버스에 당일 자신이 감각한 일상 경험을 하나의 색으로 표현한다. 칸딘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멜로디 박 작가도 비시각적인 자극에서 색상이 연상되는 공감각을 느낀다고 한다. 이 연작을 구성하는 개별 캔버스들을 살펴보면 인쇄된 듯 매끈하게 칠해진 색이 아니라 안료의 역동적인 물성이 느껴지는 물질로서의 색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안료를 다양하게 조합하고 다루며 매일 새로운 색을 만들어냄으로써 물질에 대한 감각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 세계에서 색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멜로디 박의 작업은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편재하는 지금의 이미지 문화와 좋은 대비가 된다. 물론 물성과 가상성의 이항대립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멜로디 박 작가는 어떠한 관계성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색을 다룬다. 그렇게 함으로써 꿋꿋하게 회화적 실존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The Artistic Practice of Melody Park
By Kim Jung-Eun
The creative impulse of an artist arises from a considered engagement with the conditions of their immediate reality. It is within these parameters that conceptual intention takes form, leading to a sustained process where creation is actualised. Through repetition and accumulated experience, the artist may arrive at insights that reach the core of their inquiry—ultimately defining what might be formed as their artistic world.
Among the most immediate realities confronting the painter is the material behaviour of their medium. On the canvas, pigment merges, disperses, saturates, congeals, dries, or fractures, these are negotiation process every painter must undertake. Colour, in this context, is inherently relational—it shifts according to light, surface, and environment. To work meaningfully with colour requires a painter to communicate with the materials, to engage in a dialogue that sometimes evokes a sense of the material speaking back or a state of dissolution between subject and substance.
In her solo exhibition Spring Snow to Summer Watermelon, Melody Park presents a body of work that articulates perceptual fragments gathered through embodied experience during the seasonal arc from spring to summer. The shifting affective tones of these seasons changing become tangible through her manipulation of colour as substance. While developing this series, Park found herself returning to the idea that “seasons are how we see the passage of time in colour”. This meditation anchors the work with conceptual resonance and lyrical precision. A central work in the exhibition, Spring Snow, April, offers a response to an unseasonal April snowfall. Through a broad application of pale mint layered with opaque white, the piece evokes a synesthetic memory—a scenery of abstraction of perception. A singular red band grounding the bottom edge provides a compositional counterweight.
Park’s approach to the canvas itself is shaped by her education in the United Kingdom, where she engaged in traditional canvas-making workshops. She internalised the logic of standardised dimensions, later applying the knowledge to determine formation according to her own requirements. Fabricated to her specifications and arrives pre-primed in white, Park often retains areas of the primed surface, treating them not as neutral but as structural elements—integral to the final composition, as evidenced in Where There is Pink, There is Peace and Lapis Lazuli.
The artist’s sustained inquiry into pigment and its physical properties is central to her practice. From the outset, Park has resisted treating colour as symbolic or decorative; instead, explores its presence as a material force. Her heightened chromatic sensitivity—an embodied perceptual condition—initially led her to the act of painting. With a background in baking in her early career involved the precise combination and transformation of substances, a tactile experience engagement which has found continuity in her painterly language.
This distinctive trajectory positions Park outside the established frameworks of Korean contemporary art, which frequently prioritise socio-political interpretation or historical lineage. Educated abroad, Park operates in a space untethered from such genealogies, her work instead recalling principles of Western modernist formalism—particularly the insistence on medium specificity and the autonomy of the art object. In contrast to the Dansaekhwa— single color painting—movement, which dematerialised colour into an index of Korean spiritual identity, Park reasserts its physicality and presence.
In Park’s practice, colour often takes on titular significance. Lapis Lazuli, for instance, is both the title and the conceptual focus of a work in which a vibrant blue expands across the canvas in seemingly improvised marks. The hue is derived from the semi-precious stone lapis lazuli, historically mined in Badakhshan of Afghanistan and prized for its brilliant intensity. Once reserved for sacred figures in medieval painting due to its cost, the pigment remains rare. Park sourced a small quantity of the natural pigment and chose to apply it with a sponge rather than a brush, allowing for greater absorption and dispersion—techniques that amplify the pigment’s inherent character.
Her philosophical outlook is shaped by existentialist thought. Existentialism, rather than proposing universal truths, foregrounds individual agency within situated experience. Her academic engagement with Heidegger and Sartre culminated in her dissertation examining the existential concerns in On Kawara’s conceptual practice. Inspired by On Kawara’s Today series—paintings that date-stamp each day as a record of being—Park has maintained a daily practice since 2016. In her Diary series, each day is articulated through a single colour applied to a square canvas, functioning both as sensory trace and temporal marker.
In an era increasingly defined by virtual imagery and digital abstraction, Park’s materially grounded work offers a quiet counter-narrative. Her paintings do not posture as oppositional; rather, they are acts of fidelity to the real—to the presence of matter, sensation, and time. In doing so, Park continues to expand the vocabulary of painting, affirming its capacity to register experience in the most elemental terms.
